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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초기 국호와 명칭 변천사

by 백쉐 202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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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는 한 나라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상징적 명칭이다. 고대 국가들은 정치 체제의 변화나 영토의 확장, 외교적 목적에 따라 국호를 바꾸거나 다양한 명칭을 병행 사용하였다. 고구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건국한 이래 고구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호를 변경하거나 복수 명칭을 사용해 왔다. 이러한 국호의 변천은 고구려가 단순한 부족 연맹에서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으며, 국제적 위상과 정체성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초기 국호 사용과 그 명칭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살펴보고, 정치·문화적 의미를 분석한다.

1. '졸본부여'에서 출발한 명칭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졸본부여(卒本夫餘)’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는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졸본 지역에 정착한 것을 기념하는 명칭으로 해석된다. '졸본'은 고구려의 첫 수도이며, ‘부여’는 부여계 혈통이라는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이었다. 이때의 국호는 실질적인 국가 명칭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기원을 나타내는 표현에 가까웠다. 고구려는 초기에는 부여와의 관계를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다.

2. '고구려'라는 국호의 등장

‘고구려’라는 명칭은 주몽의 고씨 성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高句麗)’는 ‘고(高)’씨가 다스리는 구려족의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주몽의 성이 ‘고(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상징적 장치였다. 국호로서의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후 왕실 계보와 결합된 정치적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3. '구려'와 '고구려'의 병행 사용

고구려는 4세기까지 외교 문서나 내정에서 '고구려'와 '구려'라는 표현을 병행 사용하였다. '구려'는 약칭으로서 자주 사용되었으며, 중국 측의 역사서인 『위서』나 『북사』 등에서는 ‘구려’라는 명칭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는 외교적 편의 혹은 발음상의 단순화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 내부에서는 '고구려'라는 정식 국호를 보다 자주 사용하였으며, 이는 왕실의 정체성과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호칭이었다.

4. 중국 사서에 나타난 명칭의 다양성

중국의 사서들은 고구려를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는 '동이의 강국'으로 평가되며, '구려'로도 자주 불렸다. 『진서』, 『북위서』, 『수서』, 『구당서』 등에서는 ‘고구려’뿐 아니라 ‘구려국’, ‘고씨의 나라’, ‘삼한의 동북변 강국’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과 중국 중심의 외교 문서 작성 관행을 반영하는 것이다.

5. '고려' 명칭의 기원과 영향

고구려는 6세기 후반부터 '고려(高麗)'라는 명칭도 부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멸망 직전과 발해의 성립 과정에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 국가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기능했다. 이후 후삼국 시대에 등장한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고려'를 국호로 채택하였으며, 이로써 고려는 고구려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국가로 자처하였다. ‘고려’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Korea’라는 국가명칭의 어원이 되었다.

6. 국호의 정치적 활용

고구려는 국호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위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졸본부여는 부여의 문화적·혈통적 계승을, 고구려는 왕실의 고씨 계보와 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하였으며, 고려는 후대까지도 고구려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국호의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정치적 메시지를 내포하는 수단이었다. 국호를 바꾸거나 보완하는 행위는 국제 관계에서도 고구려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전략으로 기능했다.

7. 고구려 유민과 국호 계승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국호를 계승하고자 하였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인식하고, 대조영 역시 ‘고려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또 일부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나 일본으로 망명하여 '구려 출신'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이는 국호가 단순한 이름이 아닌, 민족적 소속과 정체성의 상징이었음을 의미한다.

8. 명칭 변천과 고구려의 문화 정체성

고구려는 국호와 명칭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고유한 국가 의식을 드러냈다. 고구려인의 고분 벽화나 비문 등에서도 '고구려인'이라는 자긍심이 강조되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적 일체감이 형성되었다. 고구려는 단순히 북방 민족이 아닌, 고유한 문자체계와 예술양식, 왕권 중심 사상 등 복합적인 문화를 가진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국호는 그러한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언어적 기호였다.

결론

고구려의 국호와 명칭은 시대의 흐름과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발전에 따라 점차 변화하고 확장되었다. 초기의 '졸본부여'에서 시작하여 '고구려', '구려', 그리고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국호 변천은 단순한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정통성과 정체성, 그리고 외교적 전략을 반영하는 역사적 과정이었다. 고구려의 국호 변천사는 오늘날 한민족의 역사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이라는 국명의 뿌리로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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